『정의(定義)의 시대 — AI 이후의 학교』 연재 13화 — 위임의 기준선
지난 화에서 “다 새겨라”와 “다 맡겨라” 사이에 기준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오늘은 그 선을 긋는 세 개의 질문을 제안한다. 어떤 절차를 앞에 두고 이 세 가지를 물어 보는 것이다.
질문 1. 이것이 자동화되지 않으면 위층의 사고가 막히는가
지난 화의 작업기억 논리를 그대로 기준으로 쓴다. 어떤 절차는 그 위에서 벌어지는 사고의 바닥재다. 기초 연산, 읽기 유창성, 한 분야의 핵심 개념 어휘가 그렇다. 이런 것이 자동화되지 않으면 위층 사고에 쓸 책상이 남지 않는다. 막히면, 새긴다.
반대로 세 자리 수 곱셈을 손으로 백 번 하는 것은 어떤가. 곱셈의 원리가 이해되고 두 자리 계산이 유창하다면, 자릿수를 늘린 반복이 위층을 열어 주지는 않는다. 그 반복은 맡겨도 된다.
질문 2. 이 절차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해가 만들어지는가
어떤 절차는 결과가 아니라 수행 그 자체가 이해를 낳는다. 분수의 나눗셈을 처음 배우는 아이는 “뒤집어서 곱한다”를 외우기 전에, 피자를 그려 가며 왜 그렇게 되는지 몇 번은 손으로 겪어야 한다. 그 몇 번이 없으면 절차는 평생 주문(呪文)으로 남는다. 과학의 실험 절차, 작도, 첫 문단을 직접 써 보는 일도 같은 종류다.
단, 이 기준에는 끝이 있다. 이해를 만드는 만큼의 수행은 몸으로, 이해가 완성된 뒤의 반복은 기계로. 열 번째 피자 그림은 첫 번째 피자 그림과 같은 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질문 3. 이 절차가 어림과 감각(검증의 재료)을 주는가
세 번째 기준은 이 연재의 검증 논의와 이어진다. 자릿수 어림을 몸에 지닌 사람은 계산기가 내놓은 답이 열 배쯤 이상할 때 몸이 먼저 반응한다. 300원짜리 열 개가 3만 원이라는 답 앞에서 멈칫하는 그 감각이다.
단위에 대한 감각, 그래프 개형에 대한 감각, “이 정도 실험이면 오차가 이쯤은 나온다”는 감각. 이런 어림의 감각은 절차를 직접 수행해 본 몸에만 쌓이고, 6화에서 본 검증 능력의 마지막 안전망이 된다. 감각을 만들어 주는 절차라면, 새길 가치가 있다.
한 줄 원칙과 남는 유의점
세 질문을 한 줄로 접으면 이렇다. 이해와 감각을 만드는 만큼의 절차는 몸에, 그 이후의 반복은 기계에.
유의점 하나를 덧붙인다. 이 기준선은 아이마다 다른 위치에 그어진다. 같은 절차라도 어떤 아이에게는 아직 이해를 만드는 중이고, 어떤 아이에게는 이미 소음이다. 획일적 반복량이 비효율이었던 이유이자, 개별 튜터가 가능해진 시대에 이 기준선을 아이별로 그을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인 이유다.
여기까지가 인지의 층, 곧 절차와 정의와 검증의 이야기였다. 다음 화부터는 렌즈를 크게 뺀다.
한 아이의 하루가 아니라, 한 아이가 어른이 되기까지의 시간 전체를 본다. 이 연재의 가장 중심에 있는 이야기다.
다음 화 — 14화. 아이는 수업이 아니라 맥락으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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