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定義)의 시대 — AI 이후의 학교』 연재 4화 — 사다리는 왜 만들어졌나
지난 화에서 AI 시대에 남는 능력의 하나로 “지도를 그리는 능력”(전체 구조를 먼저 보고 필요한 곳으로 내려가는 탑다운의 사고)을 예고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반대편을 정직하게 보아야 한다. 왜 지금까지 아래에서부터 배웠을까.
“그건 나중에 배워”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한 아이가 손을 든다. “선생님, 달은 왜 안 떨어져요?” 좋은 질문이다.
제대로 답하려면 중력과 속도와 궤도 이야기가 필요하고, 그 이야기를 아이가 알아들을 만큼 풀려면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은 수학 시간이고, 진도가 있고, 나머지 스물아홉 명이 있다.
교사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좋은 질문이야. 그건 나중에 배워.”
“나중에 배워”는 교사의 게으름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 학교라는 시스템이 세워진 조건의 정직한 표현이다. 한 명의 교사, 서른 명의 학생(한때는 예순 명이었다), 정해진 시간.
이 조건에서 서른 개의 서로 다른 호기심을 각자의 순서대로 따라가게 해 줄 방법은 없다. 가능한 설계는 하나뿐이다. 모두가 같은 것을, 같은 순서로, 확인 가능한 작은 단위로 잘라서 배우게 하는 것.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절차의 사다리는 그렇게 태어났다.
사다리는 발명품이었다
분명히 해 두자. 이 설계는 실패작이 아니라 위대한 발명품이었다. 소수만 글을 읽던 세계에서 거의 모든 아이가 읽고 쓰고 셈하는 세계로 넘어온 것은, 이 표준화된 사다리 덕분이다.
교육을 사다리로 잘게 썰었기 때문에 교사를 대량으로 양성할 수 있었고, 진도를 통일했기 때문에 한 교사가 서른 명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바텀업 교육은 진리여서 채택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제약 안에서 최선이었기 때문에 채택되었다.
그 제약이 무엇이었는지는 사다리 바깥에서 배운 사람들을 보면 선명해진다. 역사 속에서 개인 튜터를 곁에 둔 소수의 학습자들은 늘 다르게 배웠다. 질문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파고들고, 큰 그림을 먼저 듣고, 필요해진 기초를 그때 채웠다.
교육학자 벤저민 블룸은 1984년에 이것을 수치로 보여주었다. 일대일 튜터링을 받은 학생은 평균적으로 일반 교실 수업을 받은 학생들의 상위 2퍼센트 수준(2 표준편차 위)까지 올라갔다. 이른바 “2 시그마 문제”다.
그런데 블룸이 이 발견에 붙인 결론이 의미심장하다. 튜터를 모두에게 줄 수는 없으니, 교실 수업으로 그 효과에 최대한 근접할 방법을 찾자. 튜터는 너무 비싸다는 것 — 그것이 지난 백 년 교육 설계 전체의 대전제였다.
“나중에 배워”의 보이지 않는 비용
사다리에는 비용도 있었다. 달이 왜 안 떨어지는지 물었던 아이가 그 답을 만나는 것은 몇 년 뒤의 일이다. 그 사이에 질문은 낡고, 호기심은 이자 없이 감가상각된다.
답을 만났을 때쯤이면 아이는 자기가 그 질문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궤도 운동은 “시험에 나오는 단원”으로 도착한다. 질문과 답 사이의 이 긴 지연이야말로 바텀업 교육의 숨은 가격표였다.
그래도 지불할 수밖에 없는 가격이었다. 서른 명의 “왜?”에 실시간으로 답해 줄 존재가 세상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그 대전제가 바뀌었다. 어느 깊이의 “왜?”에도, 아이의 눈높이로, 지치지 않고 답하는 존재가 모두의 주머니에 들어왔다.
튜터는 더 이상 희소하지 않다. 그렇다면 사다리를 전제로 설계된 것들은 무엇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까.
다음 화 — 5화. 서른 개의 “왜?”에 답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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