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定義)의 시대 — AI 이후의 학교』 연재 8화 — 프롬프트는 명세서다
오늘부터 2부, 원리 편이다. AI와 함께 일하는 인간의 동작들이 결국 어떤 능력으로 수렴하는지를 본다. 시작은 가장 익숙한 단어, 프롬프트다.
같은 도구, 다른 결과
두 사람이 같은 AI에게 같은 일을 맡긴다. 한 사람은 “우리 동아리 홍보글 좀 잘 써줘”라고 쓴다. 그럴듯하지만 어디에도 못 쓸 글이 돌아온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 쓴다. “고등학교 천문 동아리 신입 모집글. 읽는 사람은 별에 관심은 있지만 망원경을 만져 본 적 없는 1학년. 활동은 월 2회 관측과 여름 캠프. 말투는 들뜨지 않게, 200자 안팎.” 훨씬 쓸 만한 글이 돌아오고, 두어 번 다듬으면 완성된다.
두 사람의 차이는 AI를 다루는 기술이 아니다. 차이는 그 전에 있다. 두 번째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언어로 고정해 두었다. 누구에게, 무엇을, 어떤 결로, 어느 분량으로. 프롬프트를 잘 쓴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잘 정의한 것이다.
건축주의 언어
이 능력에는 오래된 이름이 있다. 명세(明細, specification)다. 집을 짓는 건축주를 생각해 보자. “멋진 집을 지어 주세요”는 요청이지만 명세가 아니다.
설계가 시작되려면 건축주는 답해야 한다. 방은 몇 개가 필요한가, 아침 해가 드는 곳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가, 손님이 자주 오는가.
좋은 설계사는 도면을 그리기 전에 이 질문들로 건축주의 흐릿한 소망을 언어로 바꿔 준다. 명세가 흐리면 아무리 뛰어난 시공도 엉뚱한 집을 짓는다.
AI에게 일을 맡기는 모든 사람은 건축주의 자리에 선다. 그리고 여기서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명세를 쓰려고 앉는 순간, 많은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읽는 사람이 누구지?”라는 칸을 채우려다 막히는 것이다. 이 막힘은 실패가 아니라 이 훈련의 핵심 가치다. 명세는 기계를 향한 문서이기 이전에, 자기 생각의 해상도를 확인하는 거울이다.
낡지 않는 능력
3화에서 도구 사용법은 도구와 함께 바뀐다고 했다. 프롬프트의 요령, 그러니까 마법의 문구나 형식 팁은 실제로 모델이 바뀔 때마다 낡는다. 그러나 명세하는 능력은 낡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언어로 고정하는 힘은 AI가 똑똑해질수록 오히려 더 가치가 올라간다. 상대가 유능할수록, 병목은 지시받는 쪽이 아니라 지시하는 쪽의 명확성에 생기기 때문이다. 유능한 조력자를 곁에 둔 사람의 성과는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얼마나 정확히 아는가로 결정된다.
그런데 일은 명세로 끝나지 않는다. 명세를 보내면 결과물이 돌아오고, 그 결과물 앞에서 두 번째 동작이 필요해진다. 이 두 번째 동작이 첫 번째 동작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것 — 그것이 다음 화의 이야기다.
다음 화 — 9화. 명세하는 힘, 검증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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